공간 운솔

1. 

나무는 뜨거운 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과 숨을 제공하고,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나, 아늑한 집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로부터 파생된 목재는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 규격에 맞게 가공한 재료로, 주로 건축이나 가구에 쓰인다. 하지만 별도의 마감이 없는 목재는 뒤틀림, 갈라짐과 같은 소재의 변형이 쉽게 일어나는데, 온도와 습도 같은 조건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져야 그 형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일견 예민하고 유약해보이는 목재의 성격은 오히려 다양한 쓰임새에 맞춰 가공할 수 있다는 점,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물들이 목재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반증한다. 작가는 이와 같은 목재의 성질에 스스로를 겹쳐본다. 외부 변화에 상응하여 자신의 몸을 불렸다, 움츠렀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목재는 천천히 결론에 다다른다. 물러터지다 못해 삭아 버리거나, 단단하게 결속되거나.

2. 

언젠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의자를 본 적이 있었다. 빛바랜 색과 여기저기 작은 상흔들이 있었지만, 어디 하나 크게 부서진 부분은 없기에 그대로 작업실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형의 관점에서 그것이 신체와 접촉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혹은 그 자체로도 온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의자가 신체를 적절하게 받아내기 위해 철저히 고안된 형태지만, 신체를 제외한 하나의 개별 형태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3. 

마찬가지로 안지겸의 조각은 두 가지 형태로 읽을 수 있다. 조각은 엉성한 구조로 결합되어 그 자체로 서 있다. 다만 장치로써의 구조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어떤 몸짓을 유도한다. 그리고 유도에 따라 페달을 밟거나 손잡이를 돌린다면, 조각 안에 작은 구조들이 맞물리며 올라가고, 내려가고, 펼쳐지고, 접히는 등 투박하게 작동한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묘한 흔들림에 놀라 조심스레 다시 멀어진다. 다시 조각은 아무 일 없는 듯 서 있다. 

가구나 목재의 파편들로 재구성된 이들은 신체와의 관계 속에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다만 이 변화는 매끈하고 번쩍이는 새 의자의 견고함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은 낡고, 갈라지고, 남루한 것들로 가득한 장소, 사람의 손길과 가장 먼 곳에서 조립되어 이곳으로 옮겨진다. 새 의자가 단단하게 결속된, 강인한 피부와 구조를 내세우며 우리를 유혹한다면, 이들은 금방이라도 물러터질 상태로 서로 손을 잡고, 자신들의 갈비뼈를 힘겹게 열어젖힌다. 이에 응답하는 이는 내부 구조의 불온함을 직접 경험하고, 응답하지 않는 이는 멀찍이서 그 불안정한 외형을 바라본다. 《갈무리짓기》에서 조각은 상태로 자리한다. 신체와의 관계에서 작동하지만, 동시에 신체가 없이도 서 있는. 하나의 형태를 향하기 보다, 구조의 틈과 삐걱거림을 기꺼이 드러내며, 그 틈새로 관람자의 몸과 감각을 끌어들이는 형식과 미완의 몸짓.

문화살롱 5120

짙은 녹색 외투를 입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는 한 남자, 바위 절벽 위에 등을 진 채 서 있다. 그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며,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이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속 인물과 대치하는 듯 보이는 풍경은 자연의 거대함과 숭고함으로 해석된다.

빠른 속도로 축조되고, 또 해체되는 작금의 도시에서 영원함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자연의 영역을 인공의 영역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한 도시는 프리드리히의 풍경조차 인위적으로 구성된 조경의 일부로 곡해한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질적인 대상은 자취를 감추고, 개인이 감각할 수 있는 대상만이 현전하는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꺼내본다. 

오늘날 풍경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제 풍경은 공동의 장면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구성된 시점 혹은 관점의 산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풍경은 재현보다 재구성, 재조합과 같은 방식으로 읽히며, 고정된 실재보다 가변적인 이미지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공동으로 감각하던 자연이라는 거대한 도상은 기억의 파편, 단편적인 시선, 기입되지 않는 장소성으로 분화한다. 

작가 김민철의 작업은 낭만주의 회화처럼 경이로운 순간을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적인 시선으로 수집한 자투리들을 합성한다. 바싹 마르고 힘을 잃은 나무들은 언뜻 도시의 변두리를 거니는 산책자의 시점처럼 읽히지만, 자투리로 구성된 이미지가 품은 내러티브는 공동의 감각보다 사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그의 회화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를 감각하고, 그것을 감각하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되묻는 장치가 된다. 그의 풍경은 외부로 열리는 창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거울이라는 역설적인 구조를 지닌다. 김민철에게 ‘나무’는 외부와 자신 사이, 틈새에 위치한 존재이다.

작가 노경민의 작업은 외조모의 회고록이라는 구체적인 기억에서 출발한다. 영상과 조각은 모두 특정 장소에서 수집한 사물들, 혹은 그 잔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회고록은 개인의 기록인 동시에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는 가족 구성원의 삶의 궤적을 지도처럼 활용하지만, 그것은 땅의 객관적 사실을 기입한 고정된 지형도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혹은 공동체에 관해 되묻는 질문의 흔적에 가깝다. 이처럼 노경민에게 ‘나무’는 사라진 무언가를 빗댈 물질적 지지체로 나타난다.

《Needle in a box》는 두 개의 다른 단위가 교차하는 풍경 속에서 감각하는 주체의 위치를 탐색한다. 하나는 변두리를 배회하는 산책자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진 터를 응시하는 화자이다. 이 두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는 구체적인 풍경보다, 누군가가 수집한 파편들이 놓인다. 파편을 자처하는 바늘은 상자 안에 들어 있다. 그 바늘이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지, 혹은 모래밭 속에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는 풍경을 구성하는 불안정한 틈새를 엿보며 현재의 위치를 잠시나마 가늠해 볼 따름이다.

갤러리TYA

푹신한 가죽 시트에 앉아 테이블 위 랩탑에 손을 얹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다양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맞닿고 상호작용하는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맞닿음은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가늠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러나 가죽 시트-엉덩이, 랩탑-손, 키보드-손끝 등은 동등한 관계로 위치지어질 수 있는가? 이들은 동일한 값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외부의 사물이 실재하며, 적극적으로 상호작용 한다는 전제 아래, 맞닿음이라는 물리적 조건과 이를 둘러싼 여러 질문들이 뒤따른다.

사실 원자 단위에서 ‘맞닿음’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원자는 전자가 확률적으로 퍼져 있는 흐릿한 구름의 형태로 우리의 손끝과 대상은 빈틈없이 닿은 상태가 아닌, 전자 간 강한 반발력에 의해 결코 닿을 수 없는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접촉은 전자기력의 팽팽한 저항이 피부의 수용기관을 자극하고, 뇌가 해석한 값에 불과하기에. 엉덩이가 가죽 시트의 정보를 이용해 유추하듯, 한쪽이 다른 쪽을 읽어내는 일방향적 연산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미시적 관점에서 세계는 더 이상 상호작용의 장이 아니다. 세계는 ‘나’라는 단일 객체가 외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모델링한 결과물에 가깝다. 테이블, 의자, 랩탑, 키보드—확신을 가졌던 실재들의 자리는 해석과 구성이라는 미세한 균열 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균열은 우리를 실재를 향한 의심과 함께 감각 자체의 차원으로 되돌려 놓는다. 자극은 더 이상 실재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가시광선, 전파, 파동처럼 수많은 정보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지만, 우리는 그 중 극히 일부, 서로를 밀어내고자 하는 충동만을 수집하고 해석할 따름이다.

라틴어 impulsus-‘in안’과 ‘pellere밀다, 치다’가 결합된 impulse는 ‘안에서부터의 움직임’을 뜻한다. 심리학에서는 충동을, 신경과학에서는 신경세포를 따라 전달되는 전기 신호를, 철학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내부 상태의 외화外化를 의미하는데, 전시에서 impulse는 마치 전자 간의 순간적인 반발력과 같은 미약한 신호 혹은, 세계를 유추하기 위한 가장 미세한 단서를 자처한다. 그리고 이 단서는 단단한 실체가 아닌, 물렁한 변화의 윤곽을 더듬는 계기를 마련한다.

전시는 네 개의 작업으로 구성된다. 영상 작업 〈회로의 틈새를 걷기〉를 시작으로, 깨진 유리 어항과 작은 펌프, 식물들로 이루어진 〈허구의 세계에서 허구를 이야기하며 실재를 갈망한다〉, 상흔을 머금은 비누와 온도계가 결합된 〈내가 깨물어버린 비누와 그의 상태를 재는 온도계들〉, 그리고 철제 선반 위에 놓인 알루미늄, 유리 어항, 여과기, 스피커, LED 해충 퇴치기로 구성된 〈아직도 궤도를 돌고 있고, 아무런 말조차 없다〉까지. 일견 일상적인 재료들로 수놓인 작업들은 마치 서로 무관한 단어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치된 해체시의 한 구절처럼 단편적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움직임이라는 동적 행위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문장의 형태를 다듬어 나간다.

작품들을 가로지르는 펌프는 소량의 물을 계속해서 토해낸다. 물은 경로를 따라 흐르고, 대기의 흐름에 식물의 잎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은 귀를 자극하고, 빛은 각도에 따라 강렬함과 미약함을 오간다. 바닥에 흩뿌려진 잔디와 그를 붙잡는 토양은 천천히 자리를 옮긴다. 도시에 흩어진 이질적인 요소들-물, 빛, 소리, 공기 등-은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사물에 빌어 방출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그것을 읽고 해석한다. 

전시는 그간 감각이 성립해왔던 등식-양측을 고정하고 결속함으로써 실재라는 모종의 결과값을 도출해내는 부동의 수식-내려놓는다. 대신, 세계는 결코 단일한 해답으로 수렴될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불규칙적인 이동이 바닥에 남긴 경로와 흔적, 반사되어 도달하는 정보와 진폭 등을 따라간다. 세계을 틈을 잠시나마 엿보고, 감각 가능성을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이 내비치는 해解의 가능성은 사실상 가시광선, 전파, 파동처럼 끝끝내 맞닿을 수 없는 것들의 구조에 대한 가능성이다. 

유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포스트-매체의 조건을 논한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첫째, 매체들이 더 이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로 환원된다는 점, 둘째, 상이한 매체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는 점이다. 포스트-매체 이후, 조각에서 다루는 매체라는 물질 또는 물성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니며, 전부일 물질”의 서문을 빌리자면, “여전히 조각에서 물성은 중요한 요소이며, 물성이 가진 사회적 역할과 작업의 이야기를 배제한 채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재료의 이유와 당위성을 묻지 않더라도, 재료가 지닌 외부적 맥락이 작업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시는 물질의 관점에서 조각을 탐색한다. 용접으로 인해 가소성과 유속을 드러내는 철, 돌의 기록 방식을 빗댄 석고, 필연적으로 틀어지고 변형되는 목재, 그리고 공간을 구획하는 시멘트. 이들 물질은 단순한 조형 요소가 아니라, 조각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조각은 물질을 포함한다. 혹은 물질이 조각을 끌어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조각과 물질의 깊은 관계가-아무것도 아니며 혹은 전부일-전시의 제목을 수식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전시는 물질과 조각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끈다.

조각이 물질을, 또는 물질이 조각을 반드시 포함해야만 하는가? 조각과 물질이라는 개념 사이에 또 다른 항을 밀어넣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 속에서, 조각과 물질의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표면과 지지체로 구성된, 부피와 질량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형태와 재료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1.

작가 이다연은 흐릿한 경험을 잠시라도 고정하기 위한 매체-기록물과, 영원과도 같은 시간 동안 고정할 수 있는 매체-물질을 공간에 병치한다. 여기서 글은 물질을 수식하고, 물질은 글의 토대를 공고히 한다. 그는 A지점에 특정한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연필을 끄적인다. 그리고 B지점에는 가는 철을 구부려 용접하고 석고를 덧발라 고정한다. 그렇게 A와 B 사이에 모종의 등식이 성립된다. 벽에 붙은 A는 분명히 읽고, 이해할 수 있지만 B를 향해 미끄러진다. 반대로 B는 누구라도 실재함을 느낄 수 있지만, 다시 A를 향해 미끄러진다. 그렇게 분명한 것들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지만, 그 끝에 도달하는 것은 오히려 흐릿한 상태에 가깝다.

2.

작가 안지겸의 물질은 과거에 대한 종료, 즉 온점(.)의 역할을 자칭한다. 하지만 온점으로서의 물질을 논하기 전에, 온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어떤 맥락을 지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기억을, 혹은 지나간 상황을 저장하고 매듭짓는 과정은 감각 수용체로 받아들인 신호들이 기억의 형태로 뇌에 저장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수면을 통해 해당 기억이 강화되거나, 후속 기억에 의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감정기억과 서술기억, 즉 자주 인출해 사용되는 정보를 기준으로 재편된다. 이는 마치 수면이 우리의 기억을 일단락하듯, 안지겸의 조각이 그의 경험을 일단락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억과 수면의 관계는 실험에 의해 추정될 뿐, 완전히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 명확하지만 불완전한 추정이라는 성격은 그가 조각을 통해 제시한 온점의 개념과도 맞닿는다. 기능과 역할이 내재된 사물을 즉물적으로 재구성하는 그의 행위는 감정기억이 서술기억보다 우위를 점하여 순차적으로 재정의되는 기억의 매커니즘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온점은 끝맺음으로써의 온점이 아닌, 일단락으로써의 온점에 가까우며 언제든 틀어지고 변형될 가능성을 수반한다. 그것이 그의 물질이 가진, 단단하지만 유순한 역설이자 기억의 역설이기도 하다.

3.

작가 함영훈은 도시의 경계에 자리한 생물의 모습을 물질을 통해 이야기한다. 전경을 묘사하자면, 벽에 걸린 평면 내부에는 음각의 형태가 자리하고 그 옆에는 어떤 형태가 지면을 지탱하며 우뚝 서있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이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화석이 되어 발견될 벌레’와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한 새의 사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평면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만큼 미약하고 조그마한 것들이, 입체는 짓눌리고 압축된 꺼진 생의 모습이 명확하게 구현된다. 그리고 이 명확함은 경계 바깥에 있는 것들을 경계 내부로 옮기기 위한 물질적 과정을 드러낸다. 

물과 콘크리트를 양생하고 덧바른다. 회색의 견고한 도시가 완성될수록, 벌레의 거주지는 땅 밑 수로로, 새의 거주지는 도시 바깥으로 이동한다. 도시는 끊임없이 확장되지만, 그 과정에서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자취를 감춘다. 도시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물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시에 스며들고, 다소 허무한 죽음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리의 도시는 그 죽음 자체도 배제하는  듯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정리한다. 그가 물질로 구현한 이야기는 벌레와 새라는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들의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단단한 콘크리트라는 물질은 우리에게 흐릿해진 생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공표하듯 움푹 들어가거나, 불쑥 튀어나오는 식으로 공간에 자리한다. 

세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성을 다루지만 물성이 개입하는 지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물질A는 흐릿함을 명확함으로 드러내고, 물질B는 명확함와 흐릿함의 줄다리기를 포함한다. 또다른 물질C는 명확함을 흐릿함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이처럼, 조각은 물질과 이야기, 그리고 맥락을 포함한 채 이곳을 점유한다. 하지만 이 관계가 반드시 고정된 것은 아니다. 글의 초반에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조각과 물질의 관계는 필연적인가? 혹은 그 관계를 벗어나 조각이 물질을 새롭게 정의하는 방식이 가능할까? 조각은 물질로 구성되지만 물질로 환원되지 않으며, 물질 또한 조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질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혹은 전부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각은 물질을 통해, 혹은 물질과 함께 미량의 틈을 열어둔다.

문래예술공장 갤러리

최초의 SF소설로 알려진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창조에 대한 강한 집념에 사로잡혀 강력하고 죽지 않는 괴물을 창조한다. 하지만 그가 만든 생명은 끔찍할 만큼 추악한 결핍을 안고 있으며, 짝을 갈구하지만 결코 짝이 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결국 괴물은 자신의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살해하며,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한다. 또다시 홀로 남겨진 빅터와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괴물은 제네바에서 북극의 빙산까지 서로를 긴박하게 추격하며 끝없는 고립 속으로 빠져든다. 소설에서 홀과 짝-부재와 외로움, 균형과 대칭, 그리고 다시 부재와 외로움이라는 변증법적 관계는 상실감과 분노로 가득한 채, 끈적하고 어두컴컴한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홀은 짝을 갈구하지만, 짝을 얻는 순간 다시금 홀로 이어진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불완전한 생명을 만들어내면서, 그 자체로 다시 결핍된 존재가 된다. 실험의 결과로 탄생한 괴물은 짝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그 실패는 빅터를 또 다른 홀로 이끈다. 이처럼 홀과 짝의 불가분함은 결핍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로를 분리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결코 짝이 될 수 없는 홀의 분투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전시에서 검은 물질들은 엉켜붙어 서 있거나, 홀로 바닥에 놓이는 방식을 통해 공간을 점유한다. 소성을 마치고 가벼워진 몸체를 조금씩 비워내며 부재를 형성하는 숯, 즉흥적으로 주제와 경화제가 뒤섞이며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값을 만들어내는 발포 우레탄과 실리콘. 이들은 자신의 갈비뼈를 힘껏 열어젖힌 채 모여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이 그대로 홀일 수 있는가? 홀과 홀이 연대하여 홀 자체로 남을 수 있을까? 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챈 이들이 부재와 결핍 그 자체를 끌어안을 수 있는가? 조각에서부터 발화된 여러 질문들은 미완이란 칠흑같은 맺음으로 가라 앉는다. 그리고 분명히 자리한 부피와 질량이 구심점이 되어, 내부의 텅 빈 공허함으로 빨아들인다.

황금향

작은 스마트폰 하나가 나보다 나답지 않을까. 언젠가 스스로에게 건넸던 질문을 다시금 꺼내본다. 각종 인증 절차부터 SNS와 채팅, 모바일 신분증까지 물질 세계에서 나를 보장하는 여러 수단들은 디지털 세계로 편입된다. 최근 SNS 검색 피드를 들여다보면 개인의 선호도를 알 수 있다는 일종의 취향 확인 문화는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와 수많은 뉴런이 밀집하여 형성된 개인의 정체성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데이터가 곧 정체성을 구성하는 지금, 표피를 갱신하는 일보다 인터넷 접속 기록을 초기화하는 일이 세신洗身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따끔거리고 이내 벌겋게 오른 살결은 오래된 지난날을 걷어내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청결 유지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했던 날들로 인해 아로새겨진 여러 상흔을 제하고 새로운 상태로 재탄생하는 상징적 과정, 혹은 동물이 허물이나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탈피와 같은 정체성의 갱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세신이 가진 탈바꿈의 성질은 현재에 들어서 재편된다. 우리는 브라우저를 열어 묵은 쿠키와 기록을 찾아내고 부단히도 밀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기록이 삭제된 화면에는 “검색어를 입력하여 시작하세요”라는 어느 홈페이지의 시작 문구가 떠오른다.  

세신강림 속 세신사는 몇가지 무공 초식을 단련하며 자연이라는 물질을 조작하려는 듯 보이지만, 이 글에서는 행위와 현실의 질량-가상의 용량이 가진 관계에 대해 집중해본다. 고전 무협에서 인물들이 신체를 이용해 움직임을 통제하고 확장하듯, 현재의 우리는 드래그와 클릭이라는 반복 동작을 수행하며 가상의 알고리즘를 관리하며 정체성을 확장한다. 피부층의 각질과 브라우저의 기록은 개인의 주체성이라는 동일한 선상 아래 위치한다. 그렇다면 신체의 표면을 밀어내고 새살을 드러내는 세신은 과연 브라우저에서 검색 기록을 삭제하는 일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킬로그램이라는 질량 단위와 기가바이트라는 디지털 정보의 용량 단위는 상호 연동될 수 있을까? 매끈한 피부처럼 보이는 시작 화면은 정말로 새로운 나를 의미하는가? 세신을 마친 뒤, 우리는 다시 검색창을 마주한다. 비워진 칸에 문자를 입력하며 생성하는 알고리즘이라는 정보값은 다시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질량값으로,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질량값은 다시 알고리즘이라는 정보값으로 치환된다.

아르코미술관

Odor는 사물의 화학적 특성에서 비롯된 냄새를 가리키며 단순히 일반적인 냄새를 지칭하는 Smell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배합된 향을 의미하는 Scent와 구별된다. 전시는 후각을 통해 기억을 호출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개개인이 축적한 기억의 단편들을 향으로 직조하여 오도라마Odor-rama라는 서사를 형성한다.

후각은 다른 감각과 달리 해마와 편도체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 감정과 기억을 즉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캐나다의 신경심리학자 도널드 올딩 헤브는 『행동의 조직화』(1949)에서 뉴런이 동시 활성화될 때 시냅스 연결이 강화된다는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을 발견한다. 이후 실험을 통해 특정 시냅스에서 실제로 장기 강화Long-term potentiation, LTP가 일어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처럼 후각은 가장 강렬한 감각적 기억을 형성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우리는 비릿한 여름 비의 냄새, 추적이는 가을의 냄새와 같은 냄새를 재차 경험했을 때, 이와 관련된 과거의 정보들을 즉각적으로 복원해낸다. 하지만 정작 지난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저장하고 명확하게 되뇌이기 위해 다뤄온 방식은 이미지와 문자의 형태로, 개인의 일기부터 국가의 역사서까지 모든 기록의 범위를 포함한다. 이제는 견고하게 자리한 역사라는 기억의 방정식에서 향을 통해 형성한 공동의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잠시 이미지와 문자의 기억으로 돌아가보자. 일기나 역사서와 같이 제한된 저장 공간에 적절한 정보를 배치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명확한 구분이다. 필요한 정보인가, 혹은 불필요한 정보인가는 오랜 시간동안 영토 혹은 사회라는 범주 내에서 포함과 배제를 반복한 우리의 기억이자 어찌보면 포함의 연속, 또는 승리의 기억인 셈이다. 하지만 오도라마 시티는 범주화된 영역 속에서 승리를 기록한, 공인된 역사의 방정식을 휘젓는다. 작가는 한국이라는 영토를 넘어 세계 각지의 한인들, 한국계 미국인 협회, 한국계 입양인과 커뮤니티 등 여러 기관과 단체를 포섭하는 영역 확장을 시도한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에게 고착된 국가라는 영역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을 개인이 가진 상이한 시간선과 영토의 경계에 자리한 예외적인 이야기로 매듭지으며 흐릿하게 뒤섞는다. 이제 변수를 내포한 방정식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원주율처럼 순환과 무한함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소수점의 아랫자리처럼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남는 것은 축축한 콘크리트와 녹진하고 푸릇한 이끼, 건조한 나뭇결, 그리고 땅…